MODU 만나고 싶었어요

[MODU 만나고 싶었어요] 딸이 좋아하는 거 있대서 밀어줬더니 씨엘아빠됨

MODU 모두매거진 2021. 10. 21. 23:37
728x90
“좋아하는 거 있어요?
그럼 해요!”
‘씨엘 아빠’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

 

“세상살이는 엄격한 물리학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래서 재밌다.”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이기진 교수에게는 수식어가 많다. 과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중국의 백지수표를 거절한 뚝심 있는 물리학자, 글로벌 아티스트 ‘씨엘’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선택을 존중한 교육관 뚜렷한 ‘씨엘 아빠’, 예술을 좋아하고 음식을 사랑하며 프랑스 파리를 ‘제2의 고향’으로 꼽는 ‘서울러’이자 파리지앵까지. ‘부캐’ 한 번 참 많은 이기진 교수와 나눈 이야기.

 

 

Q <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는 책이 참 맛있어요. 4~5년간 꾸준히 모은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 펴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A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도 하고 공동 연구를 하면서 썼던 글과 그림들을 모은 거죠. 그곳에서 먹고 마신 것, 사귄 친구,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레 기록한 것들입니다. 원래부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거든요. 몇 년 동안 썼던 것들을 모으다 보니 ‘이건 대체 누가 쓴 거지?’ 싶긴 하더라고요. 올해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웃음) 지식을 전달하거나, 누군가에게 파리의 관광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쓴 건 아니거든요. 그냥 일상의 즐거움을 찾아 펜과 컴퓨터로 쓰고 그린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카페에 앉아 시간이 날 때 가볍게 읽었으면 합니다.

 

Q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 짬을 내서 먹는 마카롱처럼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책 곳곳에 묻어나요. 저도 파리에 가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교수님은 파리를 ‘제2의 고향’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신 경험에도 유독 파리를 더 정겹고,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가 궁금해요.

A 파리에 가면 꼭 영화의 한 장면, 연극의 무대 속에 내가 선 느낌이 들어요.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자존감을 주는 공간이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느낌이 들고, 일본에 있을 땐 좀 더 치밀한 느낌이 들었죠.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웃음) 취향이 맞았고, 그런 분위기를 아끼기 때문에 파리를 사랑했고요. 그래도 파리의 생활이 지루해지면 서울로 왔고, 서울이 답답해지면 파리로 갔었죠. 아마 20대에 처음 파리에서 공동 연구를 했고, 오래 지내며 경험하고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교감을 했기에 더 정이 갔겠죠. 해외에 나가 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 무조건 가보라고 추천해요. 외국에 나가 살며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경계를 확장해나가다 보면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Q 물리학자로서의 교수님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참 많아요. 딸들을 위한 동화도 직접 쓰고 그리는 동화작가에 전시회를 여는 작가, 로봇 개발에도 손을 대셨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한 우물을 파지 않음에도 물리학자로서 세계가 주목하는 연구 성과도 내시고요. 역시 물리학을 가장 좋아해서 가능한 일일까요?

A 물리학은 직업이니까요! 물리학이라는 전공을 정했을 때는 그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막연하기는 했어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였죠. 결과적으로는 아니었지만.(웃음)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큰 관심을 받지 않고 방목형으로 자란 편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는 운동을 좋아했고, 고등학생 때는 책을 많이 읽고 그림도 그리며 문학계를 동경했어요. 사실 아버지도 물리학자였기에 물리학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집에서 잘 놀고 있으면서도 물리학자로 일을 하시는구나,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물리학자들이 집에서 연구를 하지는 않으니 현실을 잘 몰랐던 거죠.

 

라뒤레의 마카롱이나 일인용 디저트는 그냥 먹기에는 달다. 음식을 먹고 난 후 위를 잡아주기엔 조금 과하다. 하지만 티와 함께 먹으면 제격이다. 때로는 홀로 앉아 포크로 조금씩 잘라 먹으면서 가는 오후를 음미하면 완벽한 하루를 완성할 수 있다. 디저트가 만든 사랑스러운 시간인지, 사랑스러운 시간이 만들어준 디저트인지 모르겠지만 디저트 하나로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_<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 중에서

 

Q 큰 오해를 하신 거네요.(웃음) 그럼에도 물리학을 포기하지는 않으셨군요? 연구자로서의 길을 오래 걸어오면서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으셨나요? 연구자들은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는 때가 분명 온다고 하더라고요. 

A 유학 기간에는 ‘때려쳐, 말아’의 연속이었어요. 공부가 좀 손에 잡히면 그런 생각을 잊다가 또 ‘아, 때려칠까?’의 반복이고요. 뭐, 물리학을 그만뒀을 때의 대안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복권이라도 당첨됐었다면 모를까.(웃음) 물론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었죠. 논문을 내면 보람도 느끼고 즐겁기도 해요. 그런 데에서 매력을 찾는 거죠. 결국 뭐든 애정이 있고, 나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Q 올해 초에는 교수님이 연구하는 ‘마이크로파’를 활용해서 바늘로 찔러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을 재는 기술을 개발해서 특허 출원을 진행 중이시죠. 마이크로파는 물에 잘 흡수되는 특징이 있고, 혈액도 대부분 물이니 레이저보다 더 정밀하게 혈당 농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요. 당뇨 환자들이 혈당을 재면서 피를 보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전 세계에서 관심이 아주 많은 연구라고 들었어요. 

A 10년 넘게 연구를 했는데, 진짜 어려워요. 혈액 속에 있는 아주 미약한 신호, 그 잡음을 잡아내야 하거든요. 넓은 운동장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을 찾아내야 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가능할 거라는 믿음은 있어요. 동전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요. ‘기술 상용화’라는 산이 있다면 그 정상의 90%까지는 올라왔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연구 지원비’라는 산소가 떨어진 거죠. 산소가 부족하니 판단력도 떨어지고, ‘그냥 산을 내려갈까’ 고민도 되고요. 잠시 캠프에서 숨도 고르고, 하늘이 맑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뭐든 본인이 좋아하면 그냥 하세요. 물리학이 좋으면 하면 돼요.
컴퓨터가 좋으면 죽어라고 하면 되고요.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한다는 것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자존감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Q 그런데 중국의 대기업 ‘화웨이’에서 본인들의 제품으로 만들 수 있게 기술 이전을 해준다면 연구비를 지원한다고 했었잖아요. 필요한 금액이 있다면 적어달라며 백지수표까지 내밀었지만 ‘과학자의 양심’에 따라 기술 이전을 거절하셨어요. 산소가 아주 가득 든 산소통을 받지 않은 셈이네요?
A 할 수 있다고 다 하나요? 너무 욕심을 부려선 안 돼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한 거죠. 애초에 정부 지원을 받아 시작한 연구이기도 했고 난 엄청난 애국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중국 사람도 아니죠. 서울이 좋은 사람으로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평생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Q 현재는 정부 지원이 없는 상태인데, 한국의 과학 기술 지원 제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듯해요.

A 교수는 돈이 없으면 연구하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정부나 기업체에서 지원금을 받아 연구를 하죠. 지원금이 교수 주머니에 떨어지는 건 아니고, 모두 학생과 연구를 위해 쓰입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과학 기술에 대한 투자 예산이 줄어든 건 아니고요, 예전에는 연구원 간에 2대 1의 경쟁률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4대 1 수준이거든요. 능력 좋은 연구원이 많아져서 경쟁률이 높아진 거예요. 물리학자는 내 직업이고, 정년도 몇 년 남았으니 지원을 좀 더 받기 위해 노력해야죠.

Q 교수님은 ‘씨엘 아빠’로도 잘 알려져 있으시잖아요. 방송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밝힌 아버지로서 교수님의 교육관도 화제가 됐어요. 자녀의 자퇴 결정에 ‘왜?’라는 물음 하나 없이 흔쾌히 허락해주는 데에는 엄청난 믿음이 바탕이 돼야 할 것 같아요. 정말로 자퇴를 하겠다는 딸의 결정에 걱정이 하나도 안 되시던가요? 

A 걱정할 이유가 없었죠. 나쁜 길을 가려고 자퇴하겠다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코치할 수도 없는 연예계 일이었고요. 채린(씨엘의 본명)이에게 ‘물리 공부해볼래?’ 했더니 그건 싫다던데요.(웃음) 그리고 채린이를 지켜보면서 자기 일을 하려는 열정을 분명히 봐왔어요.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인간미와 배려심이 돋보이고요. 본인은 또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요. 그럼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였죠. 씨엘의 자유로운 애티튜드와 단단한 내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아이들의 결정을 믿어줘서일까요? 항상 아이에게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말해왔어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뭘 해도 좋다, 선택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라. 단, 네가 이고 지고 갈 일에 투덜거리지는 말아라. 짜증내지도 말고.’ 제가 투덜거리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초점을 맞추려면 하루아침에 될 수는 없어요. 고양이처럼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고, 양육 태도에는 일관성을 지녀야 하죠. 채린이도, 동생 하린이도 알아서 잘 자라주기도 했어요. 훌륭한 아이들이에요. 

 

Q K-팝스타인 채린 씨, 모델이자 아티스트인 하린 씨를 키우면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날이 있을 것 같아요. 

A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채린이가 처음으로 데뷔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하린이는 홍콩대학교 입학식 때가 또 재밌는데요. 홍콩대학교는 입학식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어야 하는 전통이 있어요. 그런데 하린이 혼자 검정 블라우스에 검은색으로 맞춰 입었더라고요. ‘음! 내 딸 멋있어!’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이제 다 컸구나, 싶었죠. 

 

Q 입학식을 흔들어놓은 멋진 퍼포먼스네요. 역시 범상치 않아요.(웃음) 아이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절대 막지 않으시는군요. 미래의 물리학도들과 MODU 독자들에게도 한마디 남겨주세요. 

A 가끔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도 ‘교수님, 제가 이제부터 뭘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학생들이 있어요. ‘야, 이제까지 잘해왔잖아!’라고 말해주지만, 그럴 땐 가슴이 턱 막혀요. 그래서 본인이 좋아서, 불평과 불만 없이 공부와 연구를 놓지 않는 학생들에게 정말 고맙죠. 뭐든 본인이 좋아하면 그냥 하세요. 물리학이 좋으면 하면 돼요. 컴퓨터가 좋으면 죽어라고 하면 되고요.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한다는 것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자존감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는 연인과 도망이라도 가는 심정으로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열정은 인생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삶을 놀이처럼, 즐겁게 생각하세요!




글 전정아 사진 손홍주 그림 흐름출판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