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U 직업인 이야기

[MODU 직업인 이야기] 로봇이 침을 놓고 컴퓨터가 진맥을 한다면?

MODU 모두매거진 2021. 11. 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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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과학을 말하다

[ 한의과학자 ]

 

 

한의원에서 AI 로봇이 침을 놓고, 컴퓨터가 진맥을 한다면 어떨까? 한의과학자는 한의사 옷을 입은 과학기술 전문가다. 다가올 미래를 연구하는 직업, 한의과학자를 만났다.

 

 

 

 

의사과학자의 등장
의사과학자(MD/PhD 또는 Physician-scientist)란, 환자 치료를 병행하며 과학자처럼 연구하는 의사라는 뜻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해당 질병 분야를 연구하며 과학기술을 접목하고, 실현 가능한 단계까지 연계해주는 것을 말한다. 최근 의학계에서 의사과학자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4년부터 의사과학자 양성 교육과정을 시작해 최근 15년 사이 14명의 노벨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의학과 과학의 융합은 더 높은 수준의 생명과학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개선했다.
한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과학을 연구하는 ‘한의과학자’가 속속 등장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의사과학자와 같은 관점으로, 한의학·기초의과학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한의과학자는 전통 한의학 분야에 BT(생명공학기술), ICT(정보통신기술) 등 여러 과학기술을 접목시켜 가장 최신의 ‘한의과학’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의학과 과학의 연결지점을 찾는 한의과학자는 한의계의 발전, 그리고 보편적인 과학의 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AI 한의사’가 선도하는 디지털 한의학
한의학 분야의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이하 한의학연)은 한의과학자 양성의 흐름에 앞서가고 있다. 한의학연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로봇을 접목시켜 진단의 객관성과 정확성을 확보해 ‘스마트 한방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세계 최초의 진맥 로봇, 지능형 맥진기는 환자의 팔 길이에 맞춰 기기가 움직이며 손목에 압력을 가해 진맥을 해준다. 또한, 디지털 설진기는 혀의 색깔과 설태(혀의 표면에 생기는 털 모양의 부착물)의 분포 등을 카메라로 촬영해 환자의 병증을 진단한다. 이 밖에도 ICT 기술을 활용해 얼굴 형태와 음성, 체형 측정 등 네 가지 진단법을 하나로 통합해 사상체질을 판독하기도 한다. 현재 한의학연은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한의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반의 디지털 기술을 한의학에 접목하는 ‘디지털 한의학’으로 나아간다는 계획이다.

 

 

   한의과학자가 말하는 직업 이야기  

 

 

 

“전통 한의학을 ‘과학’이라는
언어로 재해석하다”

 

가천대학교 한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장동엽, 배효진 한의사

 

2019년에 결성된 ‘한의사 과학자모임’은 한의학에 통계, 머신러닝, 데이터 사이언스 등을 도입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젊은 한의사 과학자들이 모인 연구 네트워크다. 한의사 과학자모임을 이끌며 ‘한의과학자’라는 진로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장동엽, 배효진 한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라고 들었다. 처음 한의과학자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를 듣고 싶다.
배효진(이하 배)_ 학부생 시절에 한의학 특유의 추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적인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본과 4학년 때 ‘한의학과 인공지능, 데이터 과학의 접목’이라고 적힌 연구실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한의학을 과학으로 풀어내는 접근법이 신선했고, 한의학을 배우며 느낀 막연한 갈증을 풀고 싶었다.

장동엽(이하 장)_ 한의학에서 흔히 쓰는 몸이 차다, 뜨겁다, 허(虛)하다, 실(實)하다, 비(脾)가 약하다 등의 개념은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하기보다 인체의 전반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동양철학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한의사들이 임상을 통해 몸으로 습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의학이 옛날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비과학적이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
2019년에 결성된 ‘한의사 과학자모임’은 한의학에 통계, 머신러닝, 데이터 사이언스 등을 도입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젊은 한의사 과학자들이 모인 연구 네트워크다. 한의사 과학자모임을 이끌며 ‘한의과학자’라는 진로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장동엽, 배효진 한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서양의학이나 현대 과학이 다가가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제시할 수도 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 한의학과 과학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고자 했다.

 

 

한의학이 과학과 결합된다니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한의학의 과학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배_ 한의학에 인공지능을 대입한다는 것이 극과 극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어떠한 ‘패턴’을 찾는 데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에 속이 쓰려서 병원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내과에 가면 증상이 언제 생겼는지, 동반 증상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문진과 필요하면 정밀 검사를 통해 병인(병의 원인)을 밝히고 이에 기반한 ‘질환명’을 도출해낼 것이다. 역류성 식도염, 위염, 소화성 궤양, 기능성 소화불량과 같은.
이와 달리 한의원에서는 먼저 혀를 확인하고 맥을 짚어보며 ‘대소변의 변화가 있는지, 평소 스트레스가 많은지, 잠은 잘 자는지, 기운이 없거나 몸이 잘 붓는지’ 등의 질문을 던진다. 이 증상들에는 일종의 조합 즉, 패턴이 있다. 예를 들어 ‘평소 기운이 없고 몸이 붓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소화 능력이 떨어진다’와 같이 변수들의 상관관계를 따질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 머신러닝이나 딥러닝이 굉장히 잘하는 것들이다. 데이터로부터 컴퓨터는 변수들이 조합되는 패턴을 학습하고 예측한다. 따라서 패턴 인식이라는 큰 틀에서 한의학의 변증(병증을 가리는 일)을 예측하는 도구로, 혹은 그 원리를 비교하는 모델로 활용되기에 매우 적합하다.

 

 

그렇다면 각자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를 간단히 소개해달라.

장_ 텍스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의사의 의사결정을 컴퓨터로 재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한의학의 특징 중 하나가 고전문헌을 기반으로 한의사가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이다. 고전문헌에 나와 있는 한의학적 개념이나 용어, 예를 들어 경혈이나 약물이 한의학에서 갖는 의미를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텍스트를 학습시킨다. 이렇게 컴퓨터가 이해한 내용을 연구자가 재해석하여, 한의사가 무의식적으로 사고하는 논리를 재발견하거나 심지어는 한의학에 대한 기존 지식을 재고해볼 수도 있다. 한의학적 개념을 다루는 다른 데이터를 분석할 때 컴퓨터가 학습한 개념을 재활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논문 1저자에 이름을 올리는 연구 성과가 있었다.
_ 한의학 변증구조에 대한 인공지능 기반의 수학적 모델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즉, 한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수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진단 과정의 효율성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환자의 병증을 구별하는 ‘변증’은 오랜 시간 동안 한의사들의 현장 경험으로 체득된 지식으로, 이를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한의과학자로서 품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_ 꿈을 조금 거창하게 말해도 되나.(웃음) 지금까지 전혀 없었던 새로운 의학을 만들고 싶다. 데이터 과학을 바탕으로 한의학의 고전적인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내용으로 발전시키고, 환자를 진단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 더 많은 한의과학자가 함께할 수 있도록 연구자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연구 활동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싶다.
배_ 시대적 변화를 읽고, 한의학 이론을 현대에 맞게 변환시키는 작업에 몫을 다하는 한의학 기초연구자, 궁극적으로는 ‘해석 가능한 의료 인공지능(Interpretable Medical AI)’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 한의과학자라는 직업을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올해 ‘한의사 과학자모임’에서 진로간담회를 열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참가해서 놀랍고 뿌듯했다. 이 분야에 관심이 높아졌음을 느낀다. 모임을 통해 학술 교류를 지속하고, 해외에도 연구 결과를 널리 알리고 싶다.

 

 

이 인터뷰를 읽고 한의과학자 직업에 관심이 생겼을 <MODU>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_ ‘딴지 걸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직업을 추천한다. 내가 배우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거리를 만들어내고 질문의 답을 찾아나가길 바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웃음)
_ 작은 사례들이라도 직접 코딩을 해보고 손으로 분석해보라. 데이터 과학이 무엇인지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렵고 낯선 한의학언어를 첨단과학과 수학으로 해석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글 이은주 ●사진 손홍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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